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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베르사이유 궁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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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은아트 2007. 12. 11.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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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사이유 궁전

 궁전 정문

 

 베르사이유궁전:원래 루이 13세가 지은 사냥용 별장이었으나,

1662년 무렵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대정원을 착공하고

1668년 건물 전체를 증축하여 외관을 가로축 부분이 앞으로 튀어나온 U자형 궁전으로 개축하였다.

1680년대 다시 커다란 건물 2동을 증축하고

남쪽과 북쪽에 별관과 안뜰을 추가하여 전체길이가 680m에 이르는 대궁전을 이루었다.

이때 정원 쪽에 있던 주랑을 '거울의 방'이라는 호화로운 회랑으로 만들고,

궁전 중앙에 있던 방을 '루이 14세의 방'으로 꾸몄다

 

 

 

  베르사이유 궁전 정원  

궁전 아래로 지평선까지 끝없이 내려다보이는

이 광활하고 아름다운 정원은 정원사 앙드레 르 노뜨르 (Andre Le Notre ) 에 의해 조경되었다 . 

전형적인 프랑스식 정원인 이곳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반듯하게 맞춰져

잘린 나무들로 인공미가 느껴지기도 한다 .

거대한 정원의 좌우에는 라톤의 분수 , 아폴론의 분수 , 넵튠의 분수가 있으며

조경된 정원의 중간부터는 세느강에서 물을 끌어 만들었다는 운하가 있다 .

T 자형의 운하는 루이 14 세가 선상파티를 하기 위해 만든 곳으로

궁전에서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

 

 궁전 정원: 여러색의 꽃이 정원 가득 만발 하였다.

 

궁전정원 분수대:시원한 물줄기가 없어서 아쉽다. 

 

 

 

*베르사이유 궁전 내부

 

 

 

 

 

 

 

 

 

 

 마리앙뚜아네뜨와 3자녀:원래는 4자녀를 두었다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755년 11월 2일,

빈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토스카나 대공인

프란츠 1세와 합스부르크 가의 상속녀이자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이에서 15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그녀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의 정략결혼으로

 1770년 14살의 나이에 당시 프랑스와 왕태자였던 루이 16세와 결혼하였다.


루이는 포경 수술을 하지 않아 성불구나 다름없는 남자였다.

그래서 결혼 후 7년 동안이나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 이외의 바깥 생활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고자

베르사유 정원 한 구석에 있는 프티 프리아농에서 호화 파티나 가면무도회를 자주 열었으며,

그 파티를 통하여 그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마음껏 풀었다.


그녀의 몸을 치장하는 의상, 장신구, 보석 등에 소요되는 비용은 엄청났다.

당시 절대 왕정의 위기의 중대한 원인이었던 재정의 궁핍을 고려하지 않고

그녀는 호사스럽고도 무절제한 생활을 하며 허영과 무분별한 사려 등으로

세간에 좋지 못한 평판을 남겨 왕실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으며 민심까지 잃었다.

실례로 그녀는 민중들에게 ‘적자부인’이라는 비난어린 별명으로 불렸다.

그래서 모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서신을 보내 그녀의 잘못된 생활에 대해

크게 질책하기도 하였다

 

궁정 생활

루이 15세가 죽고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그녀는 왕비가 되어 남편으로부터 베르사유의 프티 트리아농 궁전을 선물 받았다.

그녀는 인공 연못 공사 및 바닥 공사를 비롯하여 트리아농 궁전을 개조하는데

막대한 돈을 투자하였다.

여기에 목걸이 사건은 그녀에 대한 민중의 불신은 한층 더 가중시켰다.


어느 날 로앙 대주교에게 라 모트 부인이 앙트와네트의 관심을 끄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녀는 그에게 ‘왕비가 540개 다이아몬드가 박힌 160만 루블짜리의 값비싼 목걸이를

욕심내고 있다’는 말을 흘렸다.

이에 귀가 솔깃한 로앙 대주교는 대뜸 구매 계약서에 사인하고 대금 일부를 지불해 주었다.

그러나, 목걸이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고

도중에 없어져 버렸다.

지불일이 되어 돈을 받지 못한 보석상이 앙트와네트를 찾아가 호소하자,

앙트와네트는 대주교에게 화풀이를 하였다.

재판 결과 대주교는 무죄 선고를 받았고,

사기꾼 라 모트 부인은 국외 추방령을 받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 되었지만

왕비의 체면과 위신은 떨어져버렸다.

 

프랑스 혁명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발발 이후 혁명군에 의해 포로 신세가 되었다.


8월 13일에 탕플 감옥에 왕실 일가가 모두 투옥되었다.

1793년 1월 21일에 루이 16세가 먼저 처형되었으며, 

그해 8월 1일에 그녀는 콩세르쥬리 감옥으로 이감된 뒤,

10월 초에는 공개 재판을 받았으며,

10월 16일에는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처형장으로 끌려가 단두대에 의해

1793년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그녀오빠가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오스트리아에서 적절한 대응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 당시 프랑스의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고 이 결혼자체가

오스트리아의 정략결혼 이였기 때문에  반응이 없었다.

 

 왕비의 침실

 

 

 

 

 

 

  

 

  

 

 

 

 

 

 

  

 

 

 

 

 

 

 

  

 

 

 

  거울의 방 Galerie des Glaces 

그랑 다빠르드망과 아빠르드망 드 라 렌을 잇는 벽면이

500 여장의 거울로 장식되어 있는 방으로 정원으로 난 반대편의 창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거울에 반사되는 모습은 눈이 부시다 .

  

 

Dalida&Alain Delon / Parole Parole (사랑의 언약) 

 

 

출처 : 똘이
글쓴이 : 세상만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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